73사회(인권.복지) : 한겨레신문(2012.3.23)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⑤ 파키스탄 사형수 이야기(하)

‘제주도 삼년생 똥도야지가 똥 먹고 나서 보는 멍한 하늘을 보고 싶다.’ 누군가 이런 소원을 빌었다. 그가 시인이 되기 전에는 스님이었으니 아마도 똥도야지가 똥 먹고 보는 멍한 하늘이란 게 이리저리 분별하고 딱지 붙이기 전, ‘본래 면목’을 말하는 건가. 본래 면목이란 말 역시 뭔가 멋진 깨달음이라는 분별의 냄새를 풍기니, 똥도야지가 똥 먹고 보는 멍한 하늘은 아니지.
이렇게 빗대 볼 수 있겠다. 검사는 제 바깥 누굴 봐도 그저 다 도둑놈으로 보이고 판사는 자칫 제 안을 향해 스스로를 전지전능한 심판자로 여기기 십상이어서, 멍한 하늘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법에는 중간이란 게 없다. 순 빨강과 순 노랑 사이에는 무수히 다양한 색깔의 주황색들이 있다. 하지만 법은 이런 스펙트럼의 세계를 모른다. 너 빨갱이야, 아니야? 너 살인에 가담했어, 안 했어? 순 빨강과 순 노랑은 억울하지 않겠으나 새중간에 끼인 무수히 다양한 주황색들은, 빨강 아니면 노랑, 둘 중에 하나로 딱 부러지게 갈라야 직성이 풀리는 법 앞에서 그저 억울하다 눈물 흘릴 일밖에 없다.

붓다가 설하신 ‘법’이란, 세상에 어떤 변하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실체’랄 게 없고 그저 다양한 주황의 연속으로 흘러갈 뿐이라는 연기의 실상을 이르는 것이라, 세상만사를 하나의 개념으로 찍어내는 육법전서의 ‘법’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에 온 지 고작 10일 만에 교도소로…

그날 새벽 성남 야산에서 비키와 나나 두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란 딱지를 붙여도 좋을 법한 자는 누구누구였을까. 임란은 칼을 직접 휘둘렀으니 순 빨강 살인범. 조금 떨어져 서 있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임란의 조직원도 아니고 죽은 사람들과 아무런 원한도 이해관계도 없어 죽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임란이 비키와 나나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이 두 사람을 들러리로 이용한 걸 고려해서 살인의 책임을 물어야 하나. 이들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은 또 어떤가.

이럴 경우 법은 통상 살인을 저지른 순 빨강과 아예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 노랑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네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바로 망을 보아 준 거다’라는 식으로 이유를 달아 순 빨강 살인범 일당으로 몰고 간다.

5년 형을 받은 한 친구는 대필을 시켜 이렇게 썼다. “얼마 전 변호사님이 다녀가신 뒤로 저희들 앞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 법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어 당해온 5년의 세월을 뒤돌아보니 눈물이 납니다. 선망의 대상인 한국에 와서 고작 10일 만에 교도소에 끌려와서 생활하다 추방당할 처지를 생각하니 어처구니도 없고 한국에 대해 환멸을 느껴 보았답니다.” 그래도 이 셋은 형편이 나았다. 93년 5월 사형이 확정된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언제 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다급한 상태였다. 92년과 94년에 이미 두차례 사형집행이 있었고 그때 양평 생매장 사건의 윤용필과 오태환도 교수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매년 수천명씩 사형이 집행되고 있고 특히 사우디, 이란, 이라크, 중국, 파키스탄에서는 수백에서 수천명이 사형을 당하고 있다. 미국도 사형집행이 상대적으로 많은 나라다. 파키스탄은 스스로도 수백, 수천을 사형시키기에 외국에 나가 있는 자기 국민들이 누명을 쓰건 사형집행을 당하건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사건에서도 초기부터 피고인들이 파키스탄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나라가 반듯이 서야 그 백성들도 신수가 편하다.

96년 10월 광주교도소에 가서 두 사람을 만났다. 김수환 추기경과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정말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피차 시원치 않은 영어로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 둘은 수도 없이 나에게 “서”(Sir)라는 존칭을 붙였다. “서”라는 게 영국 식민지 시절 하인이 주인에게 하던 존칭이었으니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주인을 넘어서서 구세주가 되어 주길 바랐을 터. “서”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들의 애절한 하소가 내 가슴에 짠하게 전해졌다.

진주와 안동에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은 이미 5년 형기를 거지반 마치고 만기를 6개월여 남겨두고 있었다. 더이상 진실을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들은 수사 과정에서 사실대로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임란이 아미르와 무하마드를 주범으로 모는 데 협조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다 칼로 찌르는 데 가담했다고 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겁주었다. 세 사람은 주눅이 들어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칼로 찌른 적이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서 무하마드가 커다란 실수를 했다. 수사 과정에서 자신의 결백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자 나머지 피고인들을 설득했다. ‘법정에 가면 아예 현장에 간 적도 없다고 하자.’ 피고인들이 이렇게 나오자 재판부는 아예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해 별 고민할 것도 없이 유죄판결을 했다.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사실대로 말했으면 옥석을 가려 주었을지는 당시 변호를 하지 않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잘되어 보았자 ‘너희들은 하다못해 망이라도 보아 살인을 도운 거 아니냐’ 정도 아니었을까 싶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한국에
환멸을 느껴 보았답니다”

김 추기경은 죽음의 문턱에 선
그들의 ‘빽’이 되어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
7년 만에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주범 임란도 덩달아 풀려났다

공항서 입국도 못하고 쫓겨난 무하마드 가족들

형기를 다 마쳐가던 세 사람은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정말 억울하다고 했다. 임란을 뺀 나머지 다섯명의 진술이 일치했다. 이들은 광주, 안동, 진주에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 짜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조사 결과를 추기경께 말씀드렸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지금 광주교도소에는 언제일지 모르는 사형집행일을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파키스탄 사형수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억울하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지 않고 상당히 신뢰할 만하기에 각하께서 수사당국이 이 사건을 재수사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6년 3월 추기경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세상에는 권력이나 돈, 뛰어난 재능, 높은 학문, 세상 이치에 대한 깨달음으로 존경받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보물을 어려운 이웃이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쓸 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추기경은 당신의 그 막강한 권위로 죽음의 문턱에 선 아미르와 무하마드의 ‘빽’이 되어 주었다.

97년 3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사건 처리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를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문화방송 <피디(PD)수첩>도 힘이 되어 주었다. 이 사건을 취재해 보도했다. 그래도 법무부의 입장은 완강했다. 재수사 요청도 거절하고 97년 5월 만기출소하는 세 사람이 사형수들 재심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강제출국을 유보해 달라는 요청도 거절했다. 나는 변호인단을 꾸려 재심을 청구했다.

97년 5월 세 사람이 5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던 날, 교도소에서 나온 이들은 바로 김포공항으로 끌려갔다. 공항에서까지도 수많은 내외국인들이 보는 데서 세 사람 손목을 서로 연결해 수갑을 채운 상태로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형을 다 살았는데 왜 수갑을 채우는 거냐고 변호사인 내가 항의해도 들은 체도 안 했다. 물건을 사러 가도, 화장실을 가도 한 사람이 가면 나머지 둘도 굴비 두름처럼 같이 끌려가야 했다. 그들은 22, 23살 한창나이에 돈 좀 벌어보겠다고 한국에 와서, 딱 열흘 공장에서 일한 거 빼고 나머지 5년을 살인범 누명 쓰고 감옥에서 보내고 이제 굴비 두름이 되어 한국을 떠나갔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무하마드의 가족들은 없는 돈에 어렵게 한국에 왔건만 한번은 공항에서 입국도 못 하고 쫓겨갔다. 또 한번은 교도소에서 면회를 거절당해 얼굴 한번 못 보고, 목소리 한번 못 들은 채 그냥 울며 돌아갔다. 아미르의 아버지는 이랬다. “한국에 친절한 사람들도 많아요. 김수환 추기경, 재심 청구해 준 변호사들, 면회 시간 조금이라도 더 주려 한 교도관들, 광주교도소 앞 붕어빵 장사 아줌마, 그런데 법과 당국은 왜 그렇게 완고한 건가요.”

김영삼 정부 말 나는 이돈명 변호사를 모시고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면담했다. 유엔과 앰네스티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덕일까? 임기 말인 1997년 12월, 23명을 사형집행했는데 이 둘은 여기에서 빠졌다. 정권이 바뀌어 추기경께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의 사면을 요청했고 이들은 98년 8·15 때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이듬해인 99년 2월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주범 임란도 덩달아 같은 혜택을 받고 아미르, 무하마드와 함께 풀려났다. 이 세 사람 역시 석방 당일 강제추방되었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래 지금까지 13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유엔의 사형 폐지 입장에 비추어 그래도 아시아에서는 제일 앞선 나라가 되어 있다.

사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아미르 자밀의 아버지 아메드 자밀과 그 부인. 아메드 자밀은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1997년 한국을 방문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제공
“악업을 선업으로” 안규리 교수와의 인연
아미르와 무하마드. 이들은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 보냈지만 그 뒤 이 땅에 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큰 선물을 주고 갔다. 96년 가을 무렵 나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피고인을 변호하고 있었다. 그 재판에서 시반, 시강, 음식물의 위장 잔존시간 등에 관한 법의학 소견이 주요 쟁점이 되어 서울 의대 안규리 교수에게 도움을 구했다. 무슨 이야기 끝에 아미르 이야기를 꺼냈더니 안 교수는 너무 불쌍하다며 면회를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안 교수가 광주에 면회 갔다 와서는 이러는 거였다. “아 글쎄, 그 사람들 고향 음식 좀 먹여 보려고 없는 솜씨에 카레를 해 싸들고 갔는데 교도소에서 안 받아주네요.” 나는 이랬다. “아니, 의사 선생님이 의술로 도와주어야지 카레는 웬 카레예요.” 이렇게 처음 카레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의료 봉사로 넘어갔다.

97년 3월 서울의대 교수들이 모여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혜화동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매주 일요일마다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가톨릭신학교, 동성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15년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라파엘 클리닉’ 문을 열었다. 일요일 오후 그곳에 가면 끝없이 늘어선 긴 줄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이주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이제는 매달 천여명의 환자들이 찾아오고, 100여명의 의료진과 수백명의 여러 대학 의대생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말 안 통하고 돈 없는 외국인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여기서 해결이 안 되는 어려운 수술은 2차 협력 진료기관에 보낸다.

애당초 그 끔찍한 살인사건과 이를 처리하는 법절차에서 일어난 악업(惡業)을, 추기경이며 광주교도소 앞 붕어빵 장사 아줌마, 의사 선생님들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착한 마음이 모여 선업으로 바꾸었으니 파키스탄 사람 아미르 자밀과 무하마드 아자즈도 일이 이렇게 된 걸 알면 참 기뻐할 게다.

지금도 50만명이 넘는 비전문인력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곁에서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 김형태 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 1956년 서울 출생,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천주교 인권위원장,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 특검, 의문사 진상규명위 상임위원 등 역임. 치과의사 모녀 살해, 황우석, 송두율, 인혁당 재심, 광우병 PD수첩, 용산참사 등 논쟁이 되는 사건들을 많이 맡았다. 법대 시절 법학 강의보다 문학과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술과 풍류를 즐기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