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김수환 추기경의 독려로 10여년 전에 설립된 이주노동자 무료진료소 ‘라파엘 클리닉’의 이비인후과 담당 의사가 22일 오후 서울 혜화동 동성고 강당에 마련된 진료실에서 한 이주노동자 자녀의 귀를 치료하고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라파엘 클리닉’ 추기경이 남긴 온기
1997년 이주노동자 위해 서울 혜화동 성당서 시작
“제안받자 엄청 기뻐하셔” 환자 위문, 장례비 내주기도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성고의 강당 4층 대기실. 방글라데시·네팔·중국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갖가지 표정으로 줄을 서 있었다. 파키스탄인 아버지는 걱정 어린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필리핀인 남자들은 웃으며 느긋한 이야기기꽃을 피웠다. 안쪽에선 100여명의 의료진이 바쁘게 움직이며 진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개과 의료진 20여명과 자원봉사자 100여명이다. 후원으로 들여온 임상병리 기기도 새로 설치돼, 앞으로는 이곳에서도 간단한 혈액검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오후 2시,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이제 익숙한 듯 해당 진료과를 찾아가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학교 안의 작은 병원인 ‘라파엘 클리닉’은 1997년 고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문을 열었다. 천주교 신자인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와 김 추기경의 비서신부였던 고찬근 신부가 주축이 됐다. 이들한테서 이주노동자들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김 추기경은 선뜻 설립에 동의했다. 안 교수는 “처음 제안했을 때 엄청 기뻐하시던 추기경님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며 “라파엘 클리닉을 추기경님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추기경은 명절과 여러 행사 때 이곳을 찾아 환자들을 위로하고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했다. 안 교수는 “국제노래자랑 행사 때엔 추기경님이 직접 <고향의 봄>과 <애모>를 열창하시기도 했고, 숨진 이주노동자를 위해 장례비를 보태신 일도 있다”고 전했다.

라파엘 클리닉은 애초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시작돼 1998년 자리가 넉넉한 지금의 서울 동성고 강당으로 옮겨졌다. 무료인데다 이주노동자만을 진료해, 진료 때마다 전국 이주노동자 170~350명이 몰려온다. 진료는 서울대·고려대 의대가 격주로 맡고 있다.

이를 씨앗 삼아 2006년 5월 의정부에, 2007년 10월 동두천에 비슷한 클리닉이 문을 열었다. 몽골엔 ‘의료 캠프’도 생겼다. 3년째 진료를 돕는 서울대 의대 3학년 류현진(24)씨는 “처음 찾아왔을 때 시설은 크지 않지만 종합병원에 있는 과목이 다 있어 깜짝 놀랐다”며 “배운 기술과 이론으로 다른 이를 도울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자원봉사를 하는 재중동포 김순희(53)씨는 “5년 전 유방암에 걸렸다가 라파엘 클리닉의 소개로 일산 암센터에서 수술을 받았다”며 “한 차례 뵌 적이 있는데 멀리 가신 추기경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도 300명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진료를 받았다. 방글라데시인 헤일랄(35)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일반 병원은 부담이 크다”며 “서너 차례 왔는데 친절하고 무료여서 좋다”고 말했다. 김우경 라파엘 클리닉 사무국장은 “‘국적을 떠나 아픈 사람은 치료해야 한다’는 추기경님의 정신으로 지금의 라파엘 클리닉이 운영되고 있다”며 “이런 시설이 더 많이 생겨 우리가 맡는 환자들이 줄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현준 이승준 기자 hao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