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0-11-22 16:21]

서울 혜화동 천주교 성당은 격주 일요일마다 낯선 외국인들로 붐빈다. 가난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무료 진료를 받기 위해서다.

파출부로 일하는 조선족 동포 김모씨는 3년째 이곳에서 위장약을 무료로 받아 복용하고 있으며 미얀마에서 온 T씨는 서혜부 탈장을 진단받고 이곳에서 알선해준 적십자병원에서 수술까지 받았다.

1997년 서울대병원 김전 교수를 비롯한 이 병원 교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작한 외국인 무료 진료소인 라파엘클리닉은 이제 90여명의 의사와 간호사.가톨릭 신자 등 자원봉사자들이 3백여명의 외국인을 진료할 정도로 성황리에 운영 중이다.

최근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해 이들과 함께 약봉지를 싸면서 격려했을 정도다.

그러나 라파엘클리닉의 훈훈한 정경을 다시 보기 어렵게 됐다. 이유는 최근 의약분업과 관련해 정부와 의료계.약계가 만들어낸 합의안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외국인 진료 등 자원봉사 관련 무료진료는 의약분업의 예외항목으로 인정받아 왔다.

무료진료에 나선 의사는 병원이나 의원 등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도 처방전을 발행할 수 있었다. 전문의약품의 경우 환자들은 무료로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서 조제료만 내면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앞으로 이들은 병원이나 의원 등 공식 의료기관을 찾지 않으면 처방전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의사와 약사간 힘겨루기 과정에서 의약분업의 원칙을 훼손해선 안된다는 국민설득용 대의명분이 사회적 약자인 이들에게 엉뚱한 파편으로 날아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사는 주사제의 대폭 예외를, 약사는 부작용없는 일반의약품의 슈퍼 판매 허용 금지를 덤으로 얻어냈다.

그러나 의약분업의 예외는 소외된 이들에게 오히려 자비롭게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홍혜걸 기자.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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