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주먹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고통에 처했을 때 서로를 위해내밀어줄 수도 있다.’ 탤런트 김혜자씨가 전세계 빈곤아동을위해 활동한 10년간의 기록을 담아 최근에 펴낸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국내 체류 외국인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진료소들을 취재하는 동안 이 말이 내내 귓전을 울리더군요.건강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병원은 돈 잡아먹는 귀신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이역에 온 그들은 돈 먹는귀신이 무엇보다 무섭습니다. 그래서 몸이 아파도 병원을 찾지않고 악착같이 견디다가 병을 키운다고 합니다. 이 의료사각지대를 미약하게나마 지켜온 단체가 지난 99년부터 활동해온 외국인노동자 의료공제회와 전국의 40여개 무료진료소입니다. 이곳을 찾은외국인노동자들에게 한국인의 손은 빼앗고 때리는 데만 쓰이는것이 아니고 아픈 곳을 쓰다듬고 치료하는 데 쓰이는 것이죠.◈합법체류 태국인과 파키스탄인지난 18일 경기도 화성시보건소에서 태국에서 온 여성노동자 손망(38)을 만났습니다. 한국에 온 지 3년째인 그는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하며 고국에 있는 남편과 두 아이에게 돈을 부쳐주고있습니다.
15세, 8세된 아이들을 3년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나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그리움을 억누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머리가자주 아프지만, 아주 견딜 수 없을 때만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을 뿐 병원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보건소에서처음 진료를 받았는데, 제발 큰병이 아니기만 바랄 따름이라고약간은 겁 먹은 표정으로 떠듬거렸습니다.
화성시보건소는 매달 1, 3주 일요일에 외국인노동자 무료진료를실시하고 있습니다. 김태수 소장이 작년 8월 부임한 후 관내 지소를 순회하며 진료하다가 올해부터 소내에 상설화했다고 합니다. 지역내 치과의사회, 약사회, 일반의사회와 의과대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날은 보건소 공중의들과 직원들, 그리고 지역내 초·중·고 보건교사들이 외국인노동자들을 상담, 진료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나오려면 솔직히 귀찮은 생각도 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변향순 경기과학고 보건교사는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라고 답했고, 보건소 직원인 이수영 약사는 “자원봉사자들도 하는데…”라며 싱긋 웃더군요. 김 소장은 “평일에도 외국인노동자를 진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날 보건소를 찾은 60여명의 외국인노동자 중 유창한 우리말로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지 만 3년이 지났다는 파키스탄인 모하메드(30).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는 본래습습한 성격인 듯 초면에도 “형님, 있잖아요”를 연발하며 고용허가제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더군요.그는 파키스탄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돈이 없어 3학년때 휴학을 해야 했습니다. 우연히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오게 됐는데,취업을 시켜준다던 브로커가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갖은 고생을하며 가죽공장 등을 전전하다가 현재 의약품 공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고용허가제에 따라 1년을 더 체류할 자격을 얻었지만, 이후에도 고국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고국의 연로한부모님과 러시아의 한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에게 돈을 부쳐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에서 다니던 의대는 5년내에 복학하지 않으면 퇴학당하게 돼 있지만, 복학의 꿈은 접고,대신 한국의 의약품을 고국에 대는 무역상을 새롭게 꿈꾸고 있습니다.
그는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는 8월부터 외국인노동자들에게도 건강보험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을 크게 고마워하고 있었습니다. 그의선량한 눈빛을 보며 우리 기업주들이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건강보험 가입을 기피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더군요.◈불법체류 방글라데시인과 중국동포25일 서울 혜화동 동성고 강당에서는 ‘라파엘클리닉’이 열렸습니다.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해 매주 일요일 오후에 열리는 이 무료 클리닉은 지난 97년 서울대 의대 가톨릭교수회가 주축이 돼첫 진료를 한 이래 고려대와 이화여대 의대 교수들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날은 고려대 의대 가톨릭교수·학생회에 속한 의사들과 학생들이 진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초특급’의사들이 외국인 환자들에게 자세하게 문진하며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내국인으로서도 대형병원의 불친절에 시달렸던 기억이 떠오르며 어리궂게도부럽기까지 하더군요.이 클리닉의 안규리(서울대병원 내과근무)총무는 강당 창고에서먼지가 퀘퀘하게 앉은 고리짝 3개를 보여주며 “처음엔 이걸로진료를 시작했는데, 점점 동참하는 이들이 늘어 지금처럼 각종의료시설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빵과 우유는 한 교회에서 제공한 것이라더군요. 안 총무는 “돕는 게 목적이라 종교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스님들도 먹을것을 들고 온다”며 웃었습니다.
여기서 만난 방글라데시 노동자 아카발(34·가명)은 불법체류 상태로 경기도 광주의 한 가구공장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새까만 피부에 눈이 퀭한 그는 작년에 폐질환을 앓았지만병원에서 치료를 못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외환위기때 월급도 못받고 열심히 일했는데, 이제나가라고 하니…”라며 말을 잇지 못하더군요. 어렵게 다시 입을연 그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법체류 동료들을 위해이런 클리닉이 지역 곳곳에 늘었으면 하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내비쳤습니다.
역시 불법체류 상태인 중국동포여성 박모(55)씨를 만난 것은 같은 날 정동제일교회 사회교육관에서였습니다. 여기서도 매주 일요일 무료진료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정동교회에 다니는 의료인들이 진료를 맡고 있는데, 주로 몽골과 중국동포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날 99번째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고 있던 박씨는 말을 붙이자반색을 하고는 이내 울먹이더군요.7개월동안 아무 일도 못해 생활비조차 없다고. 중국 지린(吉林)성에 살다가 브로커에게 목돈을 주고 2002년 6월에 입국한 그는 식당에 취직해 열심히 일했지만 아직까지 노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가을 합법체류자격 신고기간 때는 중풍에 걸리는 바람에 거동을못해 수속기일을 넘겼습니다.
“이제 몸은 움직일 만한데 신분증명이 안 되니 일을 시켜주는데가 없어요. 합법신분으로 1년만 일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정말소리 없이 가겠어요.”그의 목소리가 너무 절박해서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그가 손을 잡으며 “이렇게 관심을가져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며 몇번이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의 손을 마주 잡았지만, “건강한 몸으로 꼭 돈을 벌어 돌아가시기 바란다”는 속엣말은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속에서만 뱅뱅 돌았습니다. 일요일에도 나와 의료 봉사활동을 하며 ‘손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이 소망을 입으로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겠지요.jeijei@
문화일보 2004-04-27 1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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