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경향잡지' 2003년 7월호에 실린 라파엘클리닉 이야기 입니다.
당신 사랑에 답하게 하소서
“줄을 서시오, 줄을!”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일대기를 엮은 드라마에서 나와 유행어가 되었던 말이다. 신분의 귀천을 떠나 인술을 펼쳤던 허준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뭇 시청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이다. 황금만능주의에 젖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대가 없이는 하지 않으려는 이 시대에,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처지의 이주 노동자들에게 인술을 베풀며 “줄을 서시오, 줄을!” 하고 외치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있다.
서울 혜화동 대학로 끝에 자리잡고 있는 동성고등학교 강당 4층복도. 아직 진료를 시작하기 전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댄다. 서울을 비롯해 멀리 지방에서까지 와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이주 노동자들이다. 초록색 조끼를 입은 봉사자들이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진료 준비에 여념이 없다. 허름한 하늘색 천으로 칸막이를 한 과별 진료소들은 야전병원을 떠올리게 한다.
'라파엘클리닉'은 199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가톨릭 교수회와 가톨릭 학생회(CaSA)를 기반으로 시작하였다.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김형태 요한 변호사에게서 이주 노동자들의 참담한 의료실태를 들은 안규리 소화 데레사 교수가 가톨릭 교수회에 외국인 무료 진료소 개설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고, 가톨릭 학생회가 적극 참여하여 그해 4월 13일 서울 혜화동성당 백동관에서 첫 진료를 시작하였다. 첫 진료에는 약 30명의 환자가 찾았으나 그 수는 해마다 늘어 요즈음은 매번 평균 35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진료소도 백동관에서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안에 있는 성신관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이곳 동성고등학교 강당으로 옮겼으며, 지금까지 거쳐간 환자만도 2만명이 넘는다.
진료에 필요한 시설들은 이곳저곳 병원에서 쓰다가 버리거나 낡은 장비들을 수선하여 재활동하고 있으며, 무료로 나눠주는 약들은 여러 제약회사에서 후원을 받는다. 이곳에서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은 다른 협력 병원으로 보내게 되는데, 가난한 환자들이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 소개하고 모자라는 치료비를 마련해 주려고 애쓰고 있다.
'라파엘클리닉'은 매번 약 25~30명의 의사가 진료를 하는데, 17개과를 개설하여 진료과목으로는 준종합병원 수준을 갖추고 있다. 또한 80여 명의 일반 봉사자(의대, 치대 학생 포함)들이 예약, 접수, 의무기록, 안내, 통역 등 진료 이외의 일들을 처리한다. 숨은 봉사자들도 있다. 3시쯤 되면 2층 층계에 아주머니 한 분과 아들이 나와 자리를 자는다. 아무리 이름을 물어도 밝히지 않는 이들은 기다림에 지친 환자들에게 컵라면을 끓여준다. 또 분당의 한 개신교회에서는 늘 빵과 우유를 지원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천신만고 끝에 수술하여 완쾌된 환자가 찾아와 “중국 그 넓은 땅에서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선생님들이 이렇게 신경써주시고 고쳐주시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하고 울면서 인사할 때 가슴 찡한 보람을 느낀다는 안규리 교수의 이야기는 '라파엘클리닉'이 민간 외교 구실까지 톡톡히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사랑에 응답하게 해달라.”는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전 요한 소장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 가지로 나누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두 사람이 어떤 모임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아무리 잘하려 해도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미약하나마 이렇게 터를 잡아놓았으니 여기에 꽃을 피울 후속 세대를 빨리 키워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런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바빠서 참여하지 못하는 개업의사들을 한데 묶어 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진료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죠. 한 5년정도 노력하면 자리를 잡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은 작은 라파엘클리닉을 조직하여 자생력을 키워 각 지역으로 분가하는 것입니다. 고양시에만 1만 명 정도의 외국인 근로자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곳까지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라파엘클리닉'은 그 동안 격주로 진료하다가 올해 3월 16일부터 주일마다 진료한다. 환자수가 늘 것이며, 의약분업에 따라 인상된 약품비도 확보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여러 사람의 정성과 사랑의 나눔이 더욱 필요하다.
취재 / 오동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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