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02년 6월 13일 목요일 – [나눔으로 ‘함께’ 제3부 (8)]

외국인 노동자 무료진료소 라파엘 클리닉 오늘 이 시간 /저희의 몸짓이 비록 보잘 것 없을지라도/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베품보다는 늘 섬기는 자세로/자신을 낮추고 진정으로/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라파엘의 기도 중에서)

 

#라파엘이 열리는 날,이국의 노동자들에게 천국이 열린다.

젊음과 낭만의 거리 서울 혜화동 대학로.매월 첫째와 네째 일요일이면 이 거리의 한켠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인술의 현장’이 펼쳐진다. 대형상가들이 즐비한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동성고등학교.‘라파엘 클리닉’의 무료 진료가 있는 날이면 이 학교는 각지에서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들로 북적인다.오후 2시부터 진료가 시작되지만 2∼3시간 전부터 학교 바깥 인도까지 줄을 늘어서서 기다리기 일쑤다. 진료소가 마련된 학교 강당 4층은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좌우의 좁은 복도를 따라 내과,외과,정형외과,산부인과 등 16개 과목별 간이 진료소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예약부,안내부,조제실까지도 마련돼 있어 웬만한 ‘야전병원’을 방불케 한다.

서울대병원 의사 25명과 8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수년째 의료봉사를 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현장이다. 이들은 비록 장소가 비좁고 의료시설도 부족하지만 코리안 드림을 위해 낮선 땅을 찾아온 환자들을 상대로 정성을 다해 진료하고 치료한다.한국땅에서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이국의 노동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온 그들에게 라파엘 클리닉은 육체적인 치유의 장소임과 동시에 정신적 안신처와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 오면 고국땅의 가족과도 같은 의사들의 극진한 치료와 자원봉사자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만날 수 있다.무엇보다도 자신들을 멸시하는 차가운 눈초리나 인권침해,불법체류나 강제 추방에 대한 불안감이 없다는 것이 더 큰 위안이다.그래서 그들은 주저없이 말한다.‘라파엘 클리닉이 있는 하루는 바로 지상 천국이 열리는 날’이라고.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파엘 클리릭이 문을 연 것은 1997년 4월.서울대병원 신장내과 안규리 교수를 비롯한 의사 10여명이 의기투합해 시작했다.천주교인권위원회로부터 당시 광주교도소에 사형수로 수감중이던 파키스탄인 2명의 비참한 의료실태를 우연히 전해들은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교도소를 직접 방문했던 의사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수감자들과 차별받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안교수 등은 서울대병원 가톨릭의사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의사 10여명이 동참했다.또 당시 무의탁노인 돕기 사회봉사를 하고 있던 가톨릭학생회(CASA) 소속 의대생들도 스승들의 용기있는 결단에 두팔을 걷고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진료장소와 시설이 문제였다.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장소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을 빌렸다.하지만 진료시설과 기구들을 마련할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우선 급한대로 각 병원에서 쓰다 버린 베드,의자,의료기구 등을 모아 재활용하기로 했다.다행히도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로부터 200만원 상당의 약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첫 진료가 열리던 날.외국인 노동자 30여명이 왔다.잘린 손가락 부위가 곪아 썩어버린 방글라데시인,제때 식사를 하지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필리핀인,임신한줄도 모르고 작업하다 하혈한 네팔 여인 등.일부 환자들의 몸 상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진료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환자들이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100명,200명,300명을 넘어서면서 더이상 성당안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가톨릭대 성신관으로 진료소를 옮겼다가 98년 6월 현 동성고 강당으로 다시 한번 이사를 했다.처음에 이름붙였던 ‘외국인 무료 진료소’도 성경속의 치유의 천사를 의미하는 ‘라파엘 클리닉’으로 바꿨다.

현재 고정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의사들은 25명.여기에 의대생 20여명도 동참하고 있다.선후배,졸업생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의료시설과 후원금도 처음보다 많이 늘었다. 게다가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일반 자원봉사자 80여명도 어느때부터인가 이곳을 움직이는 ‘또하나의 축’이 되었다. 내과에서 진료봉사를 하고 있는 김태민씨(레지던트 2년)는 “1∼2가지의 직업병을 앓고 있는 외국인 환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면서 “작으나마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데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소아과 고재성씨(37)는 “환자들이 너무 많이 와 모두 진료해 주지 못하고 돌려 보낼 때 제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초창기 멤버인 안규리 교수는 “동료,선후배의 아낌없는 후원과 묵묵히 일해온 자원봉사자들의 노고 덕분에 5년동안 엄청난 기적을 이뤘다”면서 “라파엘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작은 마음도 하느님께서 도구로 쓰시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며 겸손하게 웃었다.

 

# 5년간 3만3000여명에 의료 봉사

지금까지 라파엘 클리닉을 거쳐간 외국인 환자는 모두 3만3000여명. 97년 3000명,98년 4700명,99년 7000명,2000년 9200명,2001년 9000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매 진료때 방문자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 요즘은 400∼500명선에 이른다. 국적별로는 재중동포가 절반을 차지하고 인도네시아,네팔,방글라데시인 순으로 많다. 최근엔 몽골과 러시아인 환자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 98년부터는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과 선교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김전 소장(53·생리학교실 교수)은 “찾는 환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지난해부터는 일반병원처럼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다”면서 “재정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빠른 시일내에 격주로 하던 진료를 매주로 늘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2-26 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