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사랑 그리고 희망 – 2009 대한민국 리포트>
그늘진 곳에 仁術… 외국인 근로자의 ‘치유 천사’’

사랑·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 의료자원봉사단체 ‘라파엘 클리닉’

“어디가 아프세요?”
“허랍(혈압)이 높아서요.
다리도 부어요.
심장? 신장이 안 좋은가 봐요.”
“지난번에 하신 혈액검사 결과는 당뇨도 없고 정상입니다.”
“당뇨? 당뇨가 뭐예요, 영어로?”
지난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고 내 가톨릭청소년회관 4층.
복도를 따라 길게 설치된 간이 진료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진찰을 받고 있었다.

대기실을 발디딜 틈 없이 가득 메우고 있는 이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중국어, 방글라데시어, 러시아어 등 쓰는 말도 제각각이지만 모두 아픈 몸을 이끌고 찾아온 환자들이었다.

이곳은 서울대 등 의과대학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의료자원봉사단체 ‘라파엘 클리닉’이 운영하는 무료진료소. 라파엘 클리닉은 지난 1997년부터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와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면 이곳은 어김없이 라파엘 클리닉의 진료실이 된다. 이날은 격주로 열리는 ‘큰 진료일’로 17개 과(科), 30여 명의 전문의들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하루 평균 3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다녀간다.

진료실의 모습은 야전병원을 연상케 할 만큼 어수선했다. 강당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책상을 놓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각 과 전문의들이 환자를 보고 있다. 대기석도 좁은 복도를 따라 놓여진 의자가 전부. 양쪽에서 진료가 이뤄지면 가운데로 한 사람이 지나갈 공간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장소는 협소했다.

하지만 진료에 나선 의료진들의 열성만큼은 여느 시설 좋은 병원 못지않다. 전로원(신장내과) 라파엘 클리닉 재무이사는 “겉보기엔 야전병원 수준이지만 이 정도 인적 자원이면 종합병원 하나는 거뜬히 차릴 수 있는 규모”라고 자랑했다. 고가의 의료장비는 없지만 초음파검사, 심전도검사, X-ray 촬영 등 기초적인 검사가 가능하고 소변, 혈액 검사도 현장에서 바로 할 수 있다.

라파엘 클리닉은 평범한 무료진료소와는 다르다. 20여 개 병원과 연계해 진료소에서 할 수 없는 검사나 치료, 수술에 이르기까지 책임지고 진행한다. 비용도 전액 클리닉측이 부담하고 있다. 진료소에는 아예 ‘트랜스퍼 팀’이 따로 있어 환자의 거주지와 가까운 연계병원으로 연결해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치유의 천사’인 라파엘을 이름으로 내건 라파엘 클리닉은 외국인 환자들에겐 구원의 빛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약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외국인 근로자들과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 병원에 가지 못했던 불법 체류자들도 이곳에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클리닉이 문을 연 1997년부터 진료소 약국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심명희(여) 약사는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제도권 밖의 사람들은 라파엘 클리닉이 아니면 도저히 치료 받을 곳이 없다”며 “아스피린 하나 구하기 쉽지 않은 이들에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갑상선 기능저하증으로 2년째 클리닉에 다니고 있는 중국동포 이성호(61)씨는 “일반 병원에 가면 혈액검사 하는 데도 돈이 들고 약값도 많이 들지만 라파엘 클리닉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방글라데시인 알론(38)씨도 “이가 아파서 왔는데 일반 병원에서는 40만∼50만원 든다고 했는데 여기에 오니 공짜로 해줬다”며 “이곳이 아니었으면 치료도 받지 못하고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진뿐 아니라 자원봉사자들도 라파엘 클리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다. 치과봉사팀에 있는 류경완(26)씨는 고교 재학 중이던 지난 2000년부터 10년째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수의대학을 졸업하고 2010년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게 됐다는 류씨는 “지금까지는 진료만 빼고 모든 봉사를 해왔는데 이제는 진료까지 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류씨는 “처음엔 누굴 돕겠다는 생각으로 나왔지만 그런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며 “이제는 그냥 여기 나오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봉사를 시작한 이종욱(23·공익근무요원)씨도 “학교에서 요구하는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시작했지만 지금은 라파엘 클리닉 활동에 푹 빠져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자원봉사자들도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이곳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통역봉사를 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인 오바이둘(52)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몇 해 전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한국어를 못하는 자국 동포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그는 “아픈 사람 도와주면 기분 좋아”라며 환하게 웃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라파엘 클리닉을 통해 건강을 되찾고 있지만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질 때도 있다. 전로원 이사는 2년 전 신장질환으로 혈액투석 치료를 준비하다 갑자기 사라진 한 필리핀 여성의 사연을 전했다. 전 이사는 “알고 보니 ‘죽을 때 엄마 옆에서 죽겠다’며 필리핀으로 돌아간 것이었다”며 “치료 기회를 놓쳐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라파엘 클리닉을 통해 전국의 병원에서 투석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총 5명”이라며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경우 연간 치료비만 2400만원에 달하는데, 이들을 지원해 주지 않으면 보통 한 달 안에 사망한다”고 말했다. 진료부터 치료, 수술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다 보니 라파엘 클리닉은 항상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문에 클리닉 식구들은 소액 기부자가 많아지기만을 바란다.

김우경(여) 사무국장은 “클리닉의 운영자금은 소액기부자와 거금을 쾌척해주시는 분들, 의료현장 선배들의 비정기 후원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매달 5000∼1만원을 내 주시는 소액기부자들이 25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라며 “소액기부자들이 많아져 재정이 탄탄해지고 더 많은 환자들에게 의료 혜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채현식기자 hschae@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9-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