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삼성사외보 '함께사는 사회' 2003년 9,10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라파엘클리닉'을 움직이는 힘은 수없이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보이지 않는 후원자들의 응집력 있고 조화로운 이웃사랑의 손길이다. 외국인 노동자 무료진료를 시작으로 인권과 구호사업을 통해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를 실천하고 있는 라파엘클리닉. 라파엘의 봉사 활동은 소외 받는 약자들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나눔의 정신을 생각하게 한다.
작은 사랑의 손길을 모아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 외국인 노동자 무료 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을 찾아서 일요일 오후, 서울 혜화동 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검고 까칠한 피부에 움푹 들어간 눈, 유난히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에 초라한 행색을 한 이방인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드는 곳은 바로 동성고등학교 4층 강당. 매주 일요일 '라파엘클리닉' 봉사팀은 정오 미사를 마치고 이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무료진료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머나먼 타국까지 흘러 들어와 몸도 마음도 지친 그들에게 라파엘클리닉은 아픔을 호소하고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고향처럼 따뜻한 이웃의 손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따뜻한 벗, 라파엘천사의 후예들 강당 1층의 층계참에서 시작되는 환자의 줄은 접수계와 의무기록실을 비롯해 내과부터 약제실에 이르기까지 빽빽하게 이어져 있다. 10여개가 넘는 진료과목마다 진료실이란게 따로 없이 비좁은 복도를 따라 책상 하나를 두고 환자와 의사가 마주할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전부다. 장마가 끝난 후의 찌는 듯한 더위를 식혀 줄 만한 것은 간간이 복도를 따라 세워 놓은 선풍기뿐, 의사도 환자도 모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비록 공간도 좁고 시설도 부족하지만 라파엘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최고의 의료수준을 가진 선생님들로부터 직접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의료는 인권의 기본이죠. 말이 안 통하고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이지만 라파엘클리닉에서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과의사이면서 총무직을 맡은 안규리씨는 클리닉 초창기 시절 멤버로서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의 손길로 빈큼없이 운영되는 이 '거대한 야전병원'이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털어 놓았다.
지난 1997년 혜화동 성당에서 처음 진료를 시작할 때의 환자 수는 34명. 변변한 의료기구 하나 없이 약 상자 두 개만 가지고 시작해서 환자가 늘어날 때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지속해 왔던 의료봉사활동이 이제 매주 일요일 하루 동안 평균 300~400명의 환자를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의 연속이 되었다. “처음에는 테레사 수녀와 같은 한 명의 성가자 필요한 일이라고 주변에서 말들 했어요. 하지만 그 한 명의 성자가 없다면 열 명 혹은 백 명의 봉사자들이 힘을 모아서 한 명의 성자가 할 수 있는 몫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죠.” 안규리 총무의 말대로 라파엘클리닉은 수많은 봉사자들이 한마음으로 일치되어 움직이는 거대한 종합 클리닉이다.
현재 라파엘클리닉에서 무료 진료활동을 하는 의사는 전체가 200여명. 그 중 한 회 진료시 참가하는 의사 수는 대략 20~30명. 그중에는 학생 봉사시절을 거쳐 의사가 된 사람, 일선에서 물러난 노당의사들, 심지어 외국인 의사들까지 있다. 그리고 이들을 도와 진료가 원할히 이루어지도록 돕는 의대생 자원봉사자들, 그밖에 접수와 안내, 통역 등 행정을 맡아보는 자원봉사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이름없는 지역 봉사자들에 이르기까지 라파엘클리닉을 움직이는 봉사자 수는 한 번에 대략 120명 정도다. 그 많은 봉사자들이 요소요소에서 얼굴도 언어도 낯선 이방인 환자들이 원할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러나 라파엘클리닉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이웃이자 벗으로 각인되는 데는 좀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 사람들을 진료하다 보면 현장에서의 단순한 진료만으로 끝낼 수가 없어요.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수술을 할 경우 수술비는 물론이고 퇴원 후 마땅히 쉴 곳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사정이 딱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써서 끝까지 돌봐야 합니다.” 송대은 사무국장의 말이다.
실제로 라파엘은 그동안 클리닉을 방문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한 식구처럼 함께해 왔다. 수술비가 없을 땐 백방으로 수소문해 수술비를 모금하고, 갈 곳이 없는 환자들에겐 쉴 곳을 찾아 주었으며, 새 생명이 안전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외국인 산모를 보호하면서 때로는 입양 주선까지 도맡아 왔다. 체벌과 체불로 고통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으면 천주교인권위원회를 통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주검을 처리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수호천사처럼 등장하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보이지 않는 활약은 라파엘클리닉을 외국인 노동자들의 따뜻한 이웃이자 벗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봉사는 '나눔'의 정신이자 사회적 책임 라파엘클리닉은 1958년 서울대 의과대 가톨릭 학생회가 주축이 됐던 빈민의료활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의료보험이 생긴 이후 빈민의료활동의 의미가 퇴색하면서 잠시 활동이 주춤했다가 1997년 천주교인권위원회로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의 참담한 실태를 접한 후 서울대의대가톨릭 교수회와 학생들이 뜻을 모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첫 진료를 실시하면서 라파엘클리닉의 봉사활동이 시작됐다.
그동안 장소문제, 예산문제, 안정된 의료시스템을 확보하는 등의 문제로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라파엘클리닉은 기본적인 의료혜택조차 보장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생명과 인권을 수호하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변변한 수술 장비하나 제대로 갖출 수 없는 허름한 장소였지만 환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돌보는 손길은 의료차원을 넘어 전인적 치료에가까울 만큼 수준급이다.
현재 라파엘클리닉은 내과, 외과를 비롯해 산부인과, 치과, 약제과 등 모두 17개가 망라된 광범위한 진료를 실시하고 있으며 환자수가 늘어나면서 예약제를 도입하였고 의사소통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서브인터제도'를 실시해 접수에서부터 약을 타는 과정까지 철저히 봉사자의 도움을 받도록 함은 물론, 현장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은 라파엘클리닉과 협력관계에 있는 병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진료 및 진료지원을 위한 모든 부서에는 의대생을 중심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사회적 참여와 봉사정신을 몸으로 배우고 있다. 장차 우리 사회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학생들의 봉사참여정신을 기르는 것이 라파엘클리닉의 또다른 목적이라고 김전 이사장은 말한다. ” 라파엘클리닉의 목적은 첫째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강조하면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러한 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어릴 때부터 봐야 한다는 것이죠. 의대생들은 이곳에서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실습하면서 미래의사 수업을 받게 됩니다. 장기적으로 올바른 의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목표와도 연관이 돼 있다고 할 수 있죠.”
라파엘클리닉에는 대학생 뿐 아니라 중, 고등학생까지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활동 할 수 있도록 봉사팀 운영을 체계화하고 있다. 봉사자들에 대한 교육은 물론 MT와 토론을 통해 좀더 질높은 의료봉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어느나라 출신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만큼 환자와 혼연일체가 된 의료진들, 교수님과 선배들 곁에서 지친 기색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환자들을 안내하고 진료를 돕는 젊은 라파엘의 후예들. 그 순수한 열정이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오후 6시, 진료소 근처를 배회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진료를 마치고도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듯했다. 2003년 여름, 추억과 낭만을 떠올리기에 좋은 혜화동 거리에는 더위에 지친 마음을 쉬게 해 주는 시원한 저녁바람이 불고 있었다.
글 · 이진경(자유기고가)/ 사진 · 서헌강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2-26 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