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10월호
글_엄중식 베드로 의학박사.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교수, 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분과장, 대한 내과학회 수련위원회 부위원장,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 홍보이사로 일하고 있다.
2008년 1월 그날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2007년 10월 몽골 진료에서 만난 샤옥도듬이라는 아기의 수술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몽골에서 아기를 처음 만났을 때 생후 5개월이라는데 갓난아이처럼 너무 작아서 놀랐고, 입술까지 파랗게 변해있던 아이의 심장에서 무슨 병인지 추정이 불가능한 심장 소리가 들렸다.
몽골을 방문한 미국 의사에게서 수술을 하면 살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울던 아기 엄마와 아기의 모습이 귀국 후에도 잊히질 않아 결국 앞뒤 가리지 않고 한국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심장수술을 위해 사전 검사를 해보니 ‘총동맥관증’이라는 고난이도의 수술이 필요한 복잡 심장기형이었고 수술 시기도 넘긴 상태였다. 수술 성공률이 50%도 되지 않고 그대로 두면 1년 이내에 사망할 것이라는 진단 결과를 듣고 이틀 밤낮을 입술이 타들어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고민에 빠졌다. 몽골에 남아있던 아기 아버지와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음을 긴 시간 이야기한 뒤 수술을 결정했다.
의료 사각지대, 이주 노동자
서울대학교병원 김웅한 교수님과 아기를 위해 기도를 드리며 보냈던 초조한 시간은 가장 길고 힘든 시간 중 하나였다. 다행히 8시간 넘게 걸린 긴 수술에도 아기는 잘 버텨주었으며 우리나라 아이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 중환자실에서 지낸 1주일 동안 키가 3cm가 넘게 크고 몸무게도 많이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파란 입술이 빨갛게 되었고 힘차게 울 수 있는 상태가 되어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아기는 몽골 의료 지원활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며 만 열 살이 되는 해에 2차 수술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를 비롯한 우리나라 이주민들이 의료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고 있음을 고민하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배려와 지원으로 탄생한 라파엘클리닉이, 2007년 창립 10주년을 맞아 새롭게 만든 비전과 미션의 하나인 해외 의료 지원활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해외 의료지원
현재 사단법인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은 몽골은 물론 네팔과 필리핀에서 직접 의료 지원활동을 하고 있으며 미얀마, 라오스, 북한 등에는 간접 의료 지원을 하고 있다.
몽골에서는 울란바토르 외곽의 도시빈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외래 병원, 모자병원, 제1병원 등과 업무 협약을 맺고 직접 진료와 심장병 어린이 초청 수술의 형태로 지원사업을 시작하여, 현재는 외래 병원 진료시설 현대화 작업을 마치고 몽골 의료인들의 현지 교육과 초청 연수 등 교육 지원활동의 형태로 진화하였다. 올해부터는 심장병 수술을 위한 심장수술센터 개설을 위한 인프라 구축 작업이 한창이다.
네팔에서는 진료뿐만 아니라 생활환경 개선을 통한 심폐질환 예방을 위해 굴뚝 만들기까지 사업을 확장하였고, 필리핀에서는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12,000여 명의 학생들을 위한 보건교육과 건강검진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근 빈민들을 위한 진료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원활동에 참여하는 많은 의사, 간호사, 약사, 의대생, 일반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활약은 글로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우리가 속한 지역의 안전을 위해서도
“우리나라에도 아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꼭 외국을 지원하느라 인력과 재원을 낭비하는가?” 대부분의 국제 지원단체가 그러하듯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활동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1990년대 이후 경제 성장의 결과로 보건의료 수준의 향상은 우리나라의 질병 양상을 바꾸어 과거의 감염질환(전염병)을 중심으로 한 질병에서 당뇨병이나 심혈관계 질환과 같은 성인 만성질환으로 주요 질환이 변화하였다.
국민건강보험 체계의 구축과 함께 저소득층의 의료문제도 현저히 감소하였다. 다른 저개발국과 같이 절대적인 빈곤이나 의료 시스템의 부재와 같은 문제는 거의 없어진 상태로 이제는 가진 재원과 의료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분배하고 의료 서비스의 문턱을 낮추는 문제가 더 주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제적으로는 저개발국을 중심으로 절대빈곤, 상하수도 시설의 미비로 인한 깨끗한 물 공급의 부족, 식량 부족으로 인한 영양 결핍 등으로 수인성 감염,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등의 전통적인 전염병들이 지속되고 있으며 신종 인플루엔자나 에볼라 바이러스병과 같은 신종 전염병이나 재출현 전염병의 유행을 예방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 세계 인구의 10억 명 이상이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하고 있고 이로 인해 8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수인성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또한 여전히 에이즈로 해마다 200만 명, 결핵으로 150만 명, 말라리아로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유아 사망으로만 따져보면 해마다 1,100만 명 이상이 폐렴, 설사,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있다.
기초적인 감염질환으로 사망하는 인구 숫자만을 보더라도 도대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며, 선천성 기형과 같은 고도의 의료 기술이 필요한 질환은 아예 논의의 대상으로 삼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2008년 멕시코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유행하였던 신종 인플루엔자에서 경험하였던 것처럼 더 이상 전염병에 대해 국가 간 장벽이나 대륙 간 장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공기와 같은 교통 시스템의 발전은 한 지역에서 일어난 감염질환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고작 72시간이면 충분한 상황이 되었다.
현재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는 에볼라 바이러스병에 대해서 세계가 주목하고 자국으로의 유입을 예방하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이 세계는 말 그대로 ‘지구촌’으로 저개발국가의 의료 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게을리하고 낮은 보건의료 수준을 방치하는 경우 국제적으로 심각한 보건의료 위협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인도적 차원은 물론이고 우리가 속해있는 지역의 안전을 위해서도 국제 보건의료 지원활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비전과 목표를 분명히 설정해야
2000년 이후 종교단체를 비롯하여 의과대학과 대형병원에서 의료 지원활동이 시작되어 점차 수적 양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최근에는 의료 지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고 이로 인해 현지 주민들이나 의료인들과 갈등이 생기거나 심지어 외교적 문제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보통 의료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가 경험이 적거나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해 발생한다. 따라서 인도적 차원의 지원활동을 할 때 지원 단체의 역량을 스스로 충분히 이해해야 하며 가진 역량을 이용하여 도달하려는 비전과 목표를 분명히 설정해야 한다.
또한 의료 지원활동을 시행하는 추진 체계를 구체적이며 현실적으로 구성해야 하며 지원하려는 지역이나 국가의 의료 체계, 의료 수준, 사회 경제적인 상황 등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답사와 같은 프로그램이 선행되거나 신뢰할 수 있는 현지 파트너를 구해야 한다.
또한 지원활동이 종료된 뒤에는 현지의 반응을 모니터링 해야 하고 이를 활동에 참여한 이들에게 피드백을 하여 수정 보완할 점을 파악하고 향후 발전 방향을 논의해야 한다.
저개발국의 여기저기를 해마다 돌아다니거나 여러 나라를 유람하는 식의 지원활동은 자기만족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 저개발국 의료 지원활동의 노하우는 한마디로 영리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기업들보다 훨씬 더 확고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나 사업가는 목적하는 바를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할 수 있고 얻는 바가 적거나 없으면 철수를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의료 지원을 하는 단체가 원칙을 지키지 않고 현지 실정법을 저촉하는 행위를 하거나 현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범위의 활동을 하는 경우 장기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지며 현지인은 물론 참여한 자원활동가들의 신뢰도 잃게 되어 지속적인 발전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여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경우에도 잠깐은 환영받을 수 있으나 곧 강한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따라서 보건의료 지원활동을 할 때는 수평적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현지 의료인과 연대하여 지속적이며 점층적으로 관계 개선을 하여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결국 저개발국 현지의 주민들과 의료인들이 스스로 보건의료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건의료의 국제적 연대 강화
이제 일곱 살이 된 샤옥도듬은 사진을 찍자고 하면 얼굴에 V자로 손가락을 갖다 대며 예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명랑한 소녀가 되었다. 샤옥도듬 이후에도 수십 명의 몽골 아이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아직 큰 후유증이나 합병증을 가진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은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이 진행하는 사업이 잘되면 몇 년 뒤부터는 심장기형이 있는 몽골 어린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굳이 우리나라까지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사랑으로 보건의료의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고 행동한다면 몽골뿐만 아니라 네팔, 필리핀, 미얀마, 라오스, 북한 등에서 훨씬 더 많은 어린이들이 샤옥도듬처럼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질병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많은 환자들이 위로를 받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